노고산 아침 산책
밤새, 그리고 이른 아침까지 비가 내렸다. 바람은 좀 불었지만 깨끗해진 공기를 놓치기 싫어, 아침 산책을 나섰다.
오늘 향한 곳은 자주 가던 안산이 아니라 노고산. 이화여대 역에서 숭문중고등학교 쪽으로 쭉 내려가다 신협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제법 오래된 주택가가 나온다. 비탈길을 걷다 거북이 고시원을 끼고 왼쪽으로 꺾어져 계속 올라간다. 오른쪽 위로 숲이 보인다.
'이제 입구가 나올 만 한데...' 하는 타이밍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파란 철벽. 그 앞엔 마치 그곳이 주차장인 양 차들이 줄을 서 있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면 '식수원 시설(배수지)가 있는 곳이므로 용무 없는 사람은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과 '사유지이지만 주민 편의를 위해 6시 반부터 10시 까지 개방한다'는 서강대학교의 안내문이 함께 보이는 작은 쪽문을 만난다.
보통 산책길 같지 않은, 어쩐지 남의 집을 몰래 들어가는 느낌으로 살금살금 들어가(저절로 그렇게 된다!) 걷는 길은 기분이 묘했다. 위에 보이는 사진이 그런 기분으로 걸었던 길이다.
아침까지 내린 비로 사방이 촉촉해 기분이 좋았다. 남의 집을 몰래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어느새 사라지고 미끄러운 산길을 조심조심 걷던 그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났으니 바로 사진에서 보이는 토끼 한 쌍.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풀을 뜯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도 도망을 치기는 커녕 토실한 몸을 흔들며 맛있는 풀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이라니. 노고산에는 산토끼가 사는 걸까? 아니면 누가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풀어놓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에서 도망친 걸까? 산 새나 청설모, 다람쥐는 봤어도 토끼를 만난 것은 처음이라 정말 신기했다.
노고산은 오르기 전에도 알았지만 참 작은 산이다. 하지만 참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산이기도 하다. 흙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우뚝 서 있는 큼직한 바위들도 만나게 된다. 안산 처럼 이곳도 아마 산 자체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수지와 체육공원이 함께 있었는데, 그곳 사진은 찍지 않았다. 분명 이름은 체육공원이라는데 운동기구 하나 보이지 않고 잡풀만 우거져 수북한 빈터였다. 상수원 관련 시설이라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용변을 보면 안된다고 쓰여 있었고, 화장실 역시 없었다. 이곳을 지나쳐 왼쪽으로 꺾어 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측량표가 나왔다. 이곳이 정상이다. 해발 106미터.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서강대학교 캠퍼스로 통하는 길이다.
여러 신부님들의 흉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약간 오목하니 아늑하게 들어간 곳에 작은 공원 느낌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아직은 가동되지 않는 정문 앞 분수가 보이는 길에서부터 후문까지 학교를 걷고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 루비처럼 새빨간 딸기가 보인다. 비에 젖어 검은 땅과 녹색 이파리 사이에서 귀엽게 고개 내민 작은 딸기들이 얼마나 예쁘던지... 서울에서만 자란 나는 이것이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험은 하지 않기로 하고 사진으로만 담아 왔다.
나무 사이로 한강과 여의도가 보인다. 새로 지은 높은 건물이 많아 이제 쌍동이 빌딩은 그다지 커 보이지도 않는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이대역 쪽으로 가는 길에 대흥동 주민센터가 있다. 이곳에는 야외 노천카페가 있는데, 어르신들이 운영하신다. 만두가게에서는 무럭무럭 김을 내며 찐빵과 만두가 쪄지고 카페 커피 머신에서는 에스프레소 향기가 진하다. Cafe Re(카페 리)라고 써 있는 간판에 엔젤리너스 로고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원료 제공이나 바리스타 훈련은 엔젤리너스 커피에서 전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격은 찐빵과 만두가 각각 1,000원, 카페 라떼는 2,000원이었다. 땀이 식자 찬 바람에 선뜩했는데 따뜻한 것들로 기분 좋아졌다.
산책을 마치고 집 앞에서 발견한 장미. 바람때문에 계속 흔들렸는데 생각보다 잘 나왔다. 핑크도 보라도 아닌 묘한 장미. 꽃잎이란 얼마나 섬세한지. 겹겹이 싸인 안쪽 그늘은 얼마나 깊게 느껴지는지. 오늘 아침 산책은 오.감.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