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방랑유희

음... 서촌방랑유희라. 제목을 이렇게 잡아도 되는 걸까? 뭐 목적지를 잡고 출발한 것은 아니니 짧아도 방랑인 걸로. 걷기운동을 핑계 삼아 이것저것 먹고 마시고 보고 사진 찍고 놀았으니 유희인 걸로 정해보자. 남들은 이런 걸로 '유희'를 붙이지 않는다만 '방탕'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쯤은 그저 애교 삼아 부풀린 것이라고 치고 시작하자. ㅎㅎ


출발은 서대문지하철역 입구부터였다. 옛날 극장 있던 자리img를 지나 농협 앞으로, 다시 길을 건너 적십자병원과 강북삼성병원을 지난다. 이 극장, 내가 다닐 무렵엔 개봉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근처 학생들 많이 오던 곳이었다. 조금 철 지난 영화를 다시 상영하곤 했는데 그래서 놓쳤다거나 다시 보고 싶다거나 그런 영화를 또 조금은 싼 맛에 보러오던 그런 곳이었다. 나도 또 그런 영화들을 몇 편 봤던 기억이 있다.


강북삼성병원 본관은 본래 백범 김구 선생의 댁이었던 경교장이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곳을 지나 광화문을 향해 동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경희궁서울역사문화박물관이 나온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 1910년 일제는 경성중학교를 이곳에 개교한 이래 이듬해부터 이 부지를 찢어 나누었다.


해방 후에도 경희궁이 겪은 수모는 다난하여 일제의 경성중학교를 그대로 이어 서울고등학교가 문을 열었고 그 주인도 조계사, 동국대학교 등으로 거듭 바뀌곤 했다. 1980년에야 겨우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며 동궁터엔 현재 역사문화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대한제국시절, 열강의 패권 다툼이 극심했던 증거일까, 덕수궁과 경희궁 근처에는 유난히 외국 대사관들이 많다. 역사문화박물관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 경복궁 쪽으로 올라가다 보니 많은 대사관을 볼 수 있었는데, 돌아와 구글로 검색해보니 근처에 있는 대사관만 일곱 군데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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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를 통과해 길을 건너 사직공원을 지나 서촌으로 향한다. 신문로는 왜 신문로란 이름이 붙여졌을까? 어릴 적엔 그 근처에 신문사가 많아서 신문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원래 돈의문인 서대문이 위치가 바뀌어 새로운 문이 서면서 '새문'이라 불렀고, 그 근처를 새문안이라고 했는데, 그 '새 문'을 한자로 적은 것이 '新門'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말 고운 우리말 지명들이 일제를 거치면서 한자를 사용한 억지스러운 일본식 지명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날인 오늘 생각해보니 더욱 안타깝다. 해방된지 70년이 다 되어가는데 사람이름은 해방되었지만 지명은 그대로 남아있어 바뀐 것이 없다.


잠깐 성곡미술관에 들렀다. 전시장 뒤편으로 난 계단을 위로 작은 정원과 카페가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려니 한 직원의 음성이 뒷덜미를 낚아챈다. 입장료를 내고 가란다. 응? 전시장도 아니고 카페에 가려는데 무슨 입장료를 내라나?


계단을 도로 내려가 보니 번듯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야외전시장 및 카페이용객 입장료 5,000원"이란다. 미술관 수익사업으로 카페를 두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카페를 만들어 놓고 들어가려면 5,000원의 입장료를 따로 내라니 어이없고 괘씸하단 마음부터 든다.


야외에 전시된 작품관리를 위해 1인당 5,000원의 입장료가 필요한가. 요금은 적정한 수준인가 따져볼 일이다. 적정하다면 카페는 그곳에 두면 안 된다. 카페수익금을 야외전시작품 관리에 사용하든지, 아니면 카페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곳에 설치해야 맞는다고 본다.


결국, 들어가지 않았고 당연히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미술관으로서는 만원 벌려다 한 푼도 못 번 결과가 되었다.


좋지 않은 마음을 털어버리고 걷다 보니 통인시장이 나온다. 전부터 통인시장 도시락카페를 꼭 이용해 보고 싶었지만 동행한 사람이 원하지 않으니 전에 맛보지 못한 남도식당 상추 튀김을 먹기 위해 반대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메뉴 개편을 위해 며칠 쉬기로 했단다. 골목 초입에 있는 밥+이란 곳으로 갔다. 입구에 적힌 말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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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장님 따님 이름이 윤경이고, 이 사장님은 인공첨가물과 흡연을 반대하시는 분인가 보다. 요즘 유행하는 CF의 대사 '단언컨대'가 생각나는 단호한 경고성 말투가 맨 아래 '나, 윤경이 엄마다'에서 다짐처럼 느껴지게 하니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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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돈까스덮밥, 함께 간 A는 곤드레나물 밥을 시켰다. 가격은 각각 6,500원, 7,000원. 돼지고기가 들어간 돈까스 덮밥보다 나물만 들어간 곤드레나물밥이 500원 더 비싸다. 하지만 이 집에서 담은 듯 시판 제품은 아닌 것 처럼 보이는 고추+무+마늘쫑 피클이 반찬으로 하나 더 추가된다. 상추튀김을 먹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은 맛이었다.


앞에 올린 사진처럼 실제로 미원이나 다시다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니 그러려니 할 밖에. 하지만 정말 많이 넣은 집 음식을 먹으면 따로 느껴지는 증상이 없으니 넣었어도 그리 많이 넣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밥을 먹고 나와 통인시장에 들렀다. 좌우로 늘어선 가게들이 거의 다 도시락카페 가맹점이다. 다음에 아이들과 와서 꼭 한 번 경험해 봐야지 다짐한다.


채소며 과일들을 보니 많이 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괜찮은 물건들이었고, 어찌나 깔끔하게 진열해 놨는지 집에 가져가도 다듬을 것도 별로 없을 것 처럼 보였다.


집으로 곧장 가는 길이라면 이것저것 사 들고 갈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탐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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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돌담길을 걷다 발밑을 내려다 본다. 돌 틈 사이 떨어져 박힌 은행알. 새로 떨어진 것은 냄새나는 과육과 함께 그대로 있고, 오래된 것들은 물렁한 껍질이 벗겨진 채 딱딱한 껍질만 남아있다.


인생도 그러한가 싶어 요 며칠 하늘만 찍던 내가 아래를 내려다 보고 땅 사진을 한 장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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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또 걷다 다시 사직공원 앞으로 갔다. 맞은 편에 있는 '올림 커피'라는 곳에서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쉬었다 가기 위해서다.


A가 밥을 샀으니 커피 한 잔은 내가 사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웬걸, 금방 밥 먹은 이 친구는 빵도 잡수시겠단다. 어이없지만 어쩌겠어. 햄 치즈+닭가슴살 샌드위치와 아이스 라떼, 내가 먹을 블루베리 요거트를 주문했다.


이 집은 전에 동기모임에서 밥 먹고 우연히 들렸던 집인데 약간 어설프다 싶은 내부장식에 비해 놀라울 만큼 착한 가격과 훌륭한 맛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곳이다.


샌드위치와 요거트가 각각 3,500원이고 아이스 라떼는 3,300원이다. 근처에서 입이 궁금하다거나 쉴 곳을 찾는다면 꼭 들려보라고 권할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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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걸었던 길을 따라 찍어보니(엔도몬도를 켜고 걸어 다닌 줄 알았건만, 나중에 보니 켜지 않았더라...^^;;) 대략 6.71킬로미터에 소모된 열량은 330킬로 칼로리. 하지만 먹은 것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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