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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이야기/걷기 & 여행

하이델베르크

by 열매맺는나무 2021. 8. 12.

 하이델베르크

뮌헨에서 출발해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하이델베르크는 네카어 강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1386년 대학이 설립된 이래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아주 오래전 봤던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 덕에 하이델베르크가 대학이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축배의 노래는 아직도 기억난다. 오래된 성과 교회, 대학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고성

 

하이델베르크 시가지에 어느 과자점. 출입구 옆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진열장이 너무나도 탐스러워 사진에 담아보았다. 독일말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하이델베르크 성의 오리지널 레시피로 만든 전통 수제 과자... 뭐 그런 뜻 같다. 슈니발렌에 파이, 쿠키 등등 갖가지 디저트가 호화롭다. 

 

마르크트 광장과 성령교회

아래 사진은 마르크트 광장이다. 왼쪽은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다. 유럽 언어는 참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영어로 하면 Holy Ghost Church일 테니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5개 국어 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ㅎㅎ

교회 1층을 보면 검은 처마가 빙 둘려있다. 그곳은 교회에 붙어있긴 하지만, 교회가 아닌 상가였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재된 건물로, 저 탑이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라고 한다. 건물은 붉은 사암으로 지어져 붉게 보인다. 멀리서 보면 벽돌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렇지 않다. 교회 내부로 들어가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날은 월요일이라 다행히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성령교회와 마르크트 광장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유리창이 큼직큼직하게 나 있어, 교회 내부는 예상 보다 훨씬 밝았다. 환한 빛에 비친 붉은 사암은 살구색으로 빛났다. 갈비뼈처럼 생긴 궁륭들이 천장에 즐비했고, 줄지어 늘어선 기둥들이 그걸 받치고 있었다. 건축양식으로 보면 가톨릭 성당이 분명 하나, 밝고 환한 분위기는 절대 성당 느낌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원래 성당이었지만 종교개혁 이후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성령교회 내부 모습

 

이 교회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간다고 들었다. 그 이유는 이 교회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상징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그곳의 잔해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오른쪽 맨 아래에 보면 1945.6.8.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원폭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날짜다.   

잘못은 잊은채 희생자 인양 구는 그들은 기가 막히지만, 핵무기는 정말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 당시 사람들은 그 위력을 사실 잘 몰랐고, 두 곳에 투하되고 크게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일본에 원자폭탄 12발 추가 투하할 계획이었다(연합뉴스)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기념하는 색유리

 

점 리테르 세인트 게오르그 호텔

호화로워 보이는 아래 건물은 점 리테르 세인트 게오르그 호텔. 1592년에 지어졌다는데, 지금도 실제 호텔로 사용 중이다. 성령교회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봤을 때, 보행자 전용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이 점 리테르 호텔이고 오른쪽이 성령교회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ㅜㅜ

점 리테르 세인트 게오르그 호텔

 

칼 테오도르 다리

네카 강을 가로지르는 칼 테오도르 다리 입구에 있는 쌍둥이 탑문.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자체가 고지대에 있는 데다, 이렇게 높은 탑이라면 훌륭한 망대 역할은 했을 것 같다. 좌우를 살피다 저 멀리 적이 보이면 바로 경계태세로 돌입했을까. 

다리에 칼 테오도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다리를 다시 만든 사람 이름을 땄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들었던 원래 다리는 홍수와 화재로 파손됐고, 칼 테오도르가 1788년에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Alte Brucke로 불린다. 

쌍둥이 탑

 

학자의 길, 정말 칸트?

다리 위에 올라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아래 야자수 화분이 있어 다른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사진에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오른쪽 언덕으로 '철학자의 길'이 나 있다. 칸트가 시계처럼 정확하게 점심시간만 되면 퀘니히스베르그 마을길을 산책했는데, 언덕 위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와 이 다리를 꼭 건넜다고 한다. 

다리 위에서 본 강물

하지만, 사실일까? 왜냐하면 칸트는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근방을 벗어나 본 적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프로이센에 속해 있었던 쾨니히스베르크는 지금은 칼리닌그라드로 러시아 땅이다. 거기 서서 하이델베르크까지는 차를 타고도 15시간 가까이, 걸어서는 228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다. ▶ 지도

칸트가 혹시 잠깐 하이델베르크에 갔었을지는 모르지만(그런 기록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출만큼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쾨니히스베르크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 이 길이야 말로 칸트가 매일 점심시간에 걸었다는 그 길이 맞을 터이다. 게다가 그곳 쾨니히스베르크는 교과서에 실려 우리도 잘 아는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쾨니히스베르크를 흐르는 프레겔 강에는 큰 섬 두 개가 있는데, 이 섬과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 7개가 있다. 이때 다리들을 딱 한 번씩만 건너서 처음 위치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오일러의 공식을 만든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수학자 오일러와 한붓 그리기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렀는데, 여하튼 칸트가 살았던 쾨니히스베르크에도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 필로소펜베크)이 있고, 그가 걸었을만한 다리도 7개나 있다. 칸트가 매일 점심때쯤 쾨니히스베르크 학자의 길을 건너 다리를 건넜는데, 하도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아, 점심때구나 했다는 칸트의 일화가 있었던 거다. 그런데 누군가 또 다른 철학자의 길과 칼 테오도르 다리가 있는 하이델베르크에 그 이야기를 가져와 혼돈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아, 여기가 거기구나~ 하고 그저 믿어버렸던 것이다.

오늘 아침 남편에게 물어보니, 칸트가 아니라 헤겔과 괴테란다. 사실 그 둘 뿐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수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을까. 착각과 혼돈이 사실을 밀어냈다니 재미있다. 

 

이 사람이 바로 칼 테오도르. 

칼 테오도르

 

쌍둥이 탑을 지나 오른쪽으로(아마도) 내려가면 이곳에도 호텔, 카페, 식당,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있다. 비교적 새로 지은 건물로 보인다. 비교적. 

하이델베르크 거리

 

자동차 번호판처럼 생긴 재미있는 기념품. 

하이델베르크 기념품

 

하이델베르크 고성

하이델베르크 고성 투어를 하려면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걸어가도 되지만, 푸니쿨라(Funicular) 열차를 타고 오르는 것도 재미있다. 푸니쿨라는 강삭철도로 일반적인 철도로는 돌파할 수 없는 정도의 급경사 구간에서도 운행이 가능하다. 열차에 강철 케이블을 연결하고 그 반대쪽을 언덕 끝의 엔진에 연결해 끌어올리거나 내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광물 수송을 위해 설치된 곳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덜컹덜컹 삐뚤빼뚤 수첩글씨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적어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내용인즉슨, 고성 입장료가 포함된 푸니쿨라 요금이 8유로인데, 선택 관광비가 30유로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지만, 가이드비가 너무 싸니 어쩌겠느냐... 뭐 이런 이야기. 왼쪽은 티켓 뒷면이고 오른쪽은 티켓 앞면이다. 승차권이 영수증 역할도 겸하는 셈이다. 2019년 8월 29일 11시 41분. 아.... 저 때가 좋았지.

 

열차에서 내려서 하이델베르크 고성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앞에 보이는 문은 엘리자베스 문. 프리드리히 5세가 왕비 엘리자베스 생일을 맞아 깜짝 선물로 하루 만에 만들게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생김새도 로맨틱해 보이는데, 서둘러 만들어서 그런지 바짝 가서 보면 마무리도 그렇고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긴 했다. 여하튼 하루 만에 만들어내라는 임금님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일꾼들은 얼마나 혼비백산해서 허둥지둥 움직였을지. 생각하니 딱하다. 

덕분에 사랑하는 사람과 손 잡고 통과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생겼다고. 그러니 사람들이 여기서 사진을 찍으라고 성화. 결혼했으니  이미 이뤄졌다고 해도 막무가내. 할 수 없이 손 잡고 다정하게 한 컷. 하지만, 그래서 찍은 거 아니라고요. 원래 찍으려고 했는데 말이죠. 우리 원래 사이좋다고요. 

엘리자베스 문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성인 프레히트 궁으로 들어가는 입구.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가 1400년 경에 세웠다고 한다. 전쟁으로 손상됐지만, 복구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프레히트 궁

 

아래 사진을 보면, 두 명의 어린아이가 화환과 콤파스를 들고 있다. 여기에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건축가의 아들이 죽었는데, 꿈에 나타났다. 그런데 깨어 보니, 꿈에 봤던 화환이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건물 입구에 아이들 모습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콤파스는 뭐지?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는 콤파스와 직각자가 석공 조합 프리메이슨의 상징이라던데, 건축가도 혹시 그 조합원이었을까? 

여기는 어디지? 기억이 나지 않아...ㅜ

 

프리드리히 궁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주 통을 보러 들어가는 길이다. 

술통 보러 고고고~

 

이것이 그 술통이다. 어찌나 큰지, 올라가 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 술통은 1751년 칼 테오도어 다리를 만든 그 테오도어 때 만들었다. 술통의 크기는 높이 약 7미터에 폭은 약 8.5미터로, 대략 221,726리터만큼의 술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와인 한 병이 보통 750ml니, 295,634병 분량의 와인이 담기는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술통

 

술통 맞은편에는 페르케오의 목상이 있다. 15년간 하루 18L씩 포도주를 마셨던 대주가로 항상 취한 상태였다고 한다. 80세까지 살았는데, 건강을 위해서 술을 끊어야 한다고 한 다음날 죽었다고 한다. 그 옆에도 콤파스가 있다. 하지만 직각자는 아니고 대패가 함께 있다. 이것은 술통을 만든 목수가 만들었기 때문일까?  

대주가 페르케오

 

고성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내려오는 계단참에서 내려다본 네카어강 모습. 우리나라 기와는 먹빛 아니면 푸른빛인데, 유럽의 기와는 한결같이 붉다. 이것은 라테라이트 흙을 테라코타 방식으로 구웠기 때문이다. 테라코타는 초벌구이만 한 상태. 15일간 구워 3일을 기다렸다 가마를 열어 꺼내는 우리 기와와는 다르다. 하지만 기와의 내구성과는 별개로, 오히려 이렇게 보존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야릇하다. 

성에서 내려다본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약국은 아포티케 & 화장실 입장료

하이델베르크 시내 어딘가에 있던 약국. 약국을 여기서는 아포티케라고 한다. 아포는 away, 티케는 선반, 상자, 찬장. 그래서 처음에는 창고로 쓰이다가, 잡화점으로, 허브와 향료를 파는 곳으로 되었다가, 약국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허브나 향료를 파는 창고형 매장이었다가 점차 약이 허브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약국으로 뜻이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쩐지 그리스말처럼 들리지만, 그리스에서는 약국을 파르마키오φαρμακείο라고 한다. 오히려 프랑스 pharmacie나 영국 말 pharmacy와 더 비슷하다. 

독일에서 약국은 아포티케

 

아래 사진은 독일 화장실 매표기다. 유럽 어디든 화장실 요금은 50센트로 비슷하다. 50센트 동전을 맨 위 구멍에 집어넣고, 지하철에 있는 것 같은 회전 막대를 밀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돈을 집어넣기 전에는 막대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매표기는 주로 사람이 없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 관리인이 있는 곳에는 이런 기계 없이 사람이 직접 받는다. 

카드라도 찍을 수 있으면 편할 텐데, 그런 건 없다. 그러니 길을 오래 돌아다니려면 꼭 50센트 동전을 넉넉히 갖고 다녀야 한다. 물론 레스토랑이나 공항, 카페 같은 곳에 있는 화장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고속도로나 길을 가다 보면 어쩌다 무료 화장실도 있다. 그런데, 가능한 그런 곳은 가지 말길 바란다. 갈 곳이 못 된다. 일행 중 누가 급하다고 해서 들러 봤는데, 나오던 것도 들어갈 정도.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관리인이 없어도 그렇지. 볼일을 변기가 아니라 그 근처부터 시작해서 안팎 할 것 없이 아무 데나 보는 것 같았다. 질퍽질퍽+냄새. 난 안 갔다. 

화장실 요금은 50센트

 

여행기는 정말 1년 안에 다 써야 한다. 기억이 뭐 나는 게 없다. ㅜㅜ

어쨌든, 다음에는 쾰른에 갔던 이야기를 써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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