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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이야기/일기

호수 虎鬚 - 호랑이 수염

by 열매맺는나무 2024. 11. 10.

며칠 전, 인사동에 들렀다가 인사아트센터에서 묘한 물건을 보게 되었다. 마치 댑싸리를 말려 묶은 작은 빗자루처럼 생겼는데, 성인 남자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빗자루라기엔 너무 작고, 붓이라기엔 또 너무 거칠다. 과연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며 있자니, 전시 관계자가 ‘호수요 호수’라고 일러준다.
 
호수라니 湖水? 달리는 horse? 나무에 물 주는 hose? 더욱 어리둥절 오리무중이다. 갸우뚱거리고 있자니 다시 ‘호랑이 수염이요’라고 풀어준다. 호랑이 수염? 호랑이 수염이 이렇게 굵고 길고 빳빳하단 말인가?? 정말? 
 

이 호랑이 수염이 바로...

 
호랑이를 동물원이나 동영상으로만 본 나로선 그저 막연히 클 거란 생각만 들고, 그저 엄청 커다란 고양이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그 호랑이 수염 호수란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수염이, 바짝 마르기 전엔 더 컸을 수염이 입 주변이 붙어 있었단 거지.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큰 동물이었나, 호랑이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 동물을 산에서 만난다면, 정말 집채만 하게 느껴졌으리라. 게다가 포효 한 방이면 그야말로 저절로 무릎에 힘이 빠지고 소변이라도 지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혼절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이란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십중에 팔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나온 말일 것이다. 흐엥... 
 

호수 虎鬚 - 호랑이 수염 

그래. 일단 인사동에서 본 그 묘한 물건의 정체는 호랑이 수염, 虎鬚였다. 그런데 그 호수라는 건 어디에 쓰는가?
호수는 조선시대 무관이 융복을 입을 때 쓰던 주립 양쪽에 꽂던 장식품이었다. 주립은 또 뭔가. 주립은 조선시대 당상관이 융복에 착용하던. 갓으로, 대나무를 곱게 잘라 갓을 만들고, 주칠을 해서 붉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붉을 주자를 써서 주립. 붉은 갓이라고 했다.
 
융복 (戎服)이란 군사軍事에 입었던 복식으로 비상시나 전쟁 시, 왕 행차에 시위할 때,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할 때 착용하였던 옷이다. 비상시를 대비하지만, 의례용 의복이기도 했다. 이걸 입을 때면 모자부터 평소 깜장이 아니라 시뻘건 갓을 쓰고 있으니, 머리 꼭대기부터 비상 경광등을 켜고 다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호수 虎鬚 - 호랑이 수염
주립(朱笠) CC Encyves Wiki

 

 
📌 색상별 갓의 종류

  • 흑립(黑笠) - 평상시 사용하는 검은색 갓. 대나무나 말총으로 몸체를 만들고 비단이나 무명으로 싼 다음 검정 옻칠을 한 것.
  • 백립(白笠) - 상중에 사용하는 흰색 갓. 대나무로 만든 틀 위에 베를 입힌 것.
  • 주립(朱笠) - 융복에 착용하는 갓. 대나무 갓에 주칠해 붉게 만든 것.

 
옛사람은 현대인을 능가하는 멋쟁이들이었다. 남자들의 멋 내기는 여자들은 저리 가라였고, 사치스럽기까지 했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품위 있게 멋 내기 위해선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삼가야 했던 것도 많아 정말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완벽하게 꾸미되, 화려하지 않은 절제미를 갖추기란 얼마나 힘든가.
 
조선시대, 책벌레로 이름났던 이덕무는 ‘士小節’에서, 갓 쓰는 팁을 제공했는데 하나하나 읽어보면 모두 의당 그래야 할 것 같은 내용들이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겠지. 그의 눈에 거슬리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니 글로 남기지 않았겠나. 

  1. 갓 끈은 넓지 않을 것
  2. 망건을 너무 바짝 졸라매 이마에 눌린 자국을 만들지 말 것.
  3. 망건을 너무 느슨하게 해서 흐트러지게 하지도 말 것
  4. 망건을 너무 당겨 눈초리가 당겨 올라가게 하지 말 것.
  5. 망건이 눈썹을 덮도록 내리지도 말 것.
  6. 갓은 늘 착용할 것. (단, 죄수나 부모 상을 당한 자 제외)
  7. 갓을 젖혀 쓰지 말 것.
  8. 갓끈을 손으로 잡고 다니지 말 것.
  9. 갓 아래로 곁눈질하지 말 것.
  10. 갓끈이 귓등을 지나가게 하지 말 것.
  11. 대나무로 만든 갓끈은 시골에선 몰라도 도시에선 쓰지 말 것

 
갓도 유행이 있어서 높이와 모양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고, 망건에 다는 관자나 갓끈도 그 모양이나 재료도 지위와 재력을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 망건 - 조선시대 남자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머리띠. 상투가 흘러내리거나 갓, 관모가 날아가지 않도록 했다.
  • 관자 - 망건에 달아 당줄을 넘기는데 썼던 작은 고리. 우리가 ‘관자놀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이 관자가 놓였던 자리(관자놓이)에서 비롯되었다. 신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달랐는데, 그게 관습적인 것이 아니라 심지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었고 한다.
    • 1~3 품 : 금, 옥 관자
    • 3품~서민 : 뼈, 뿔, 호박, 마노 관자

 
인사동에서 한 번 본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장신구 호수가 생각나 적다 보니, 조선시대 남자들의 멋 부리기까지 살짝 더듬게 되었다. 때때로 나라에서 규제할 만큼 그 규모가 대단했다니, 단장하기 좋아하는 것은 유전자에 새겨져 전해 내려오는 기풍인가 싶다. 하지만, 멋도 부지런해야 부리는 것. 나도 가끔은 부지런해져 볼까 싶은 생각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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