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딜리 서커스 유래와 에로스 상
토요일 저녁. '뉴욕에 헤르메스가 산다' 두 번째 권을 집어 들었다. 마침 편 곳이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에 가면' 부분이었다. 책을 읽다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몇 자 적어본다.
곡마단이 공연하는 광장이라 서커스?
어릴적에도 피카딜리 서커스가 광장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커스란 이름 때문에 '아, 이 광장에는 서커스단이 자주 와서 공연을 하는 그런 광장인가 보다'하고 지레 짐작해 버렸다. 터무니없는 오해가 그릇된 결론으로 정착된 셈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서커스가 곡마단의 서커스가 아니라 둥글다는 뜻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번의 오해가 있었다. 서커스란 말이 원 circle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어원은 같을지도.
그러나 서커스 circus(키르쿠스)는 엄연히 고대 로마에서도 사용되던 말로, 원형, 또는 타원형의 경기장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다. 현재는 터만 남아 공원으로 쓰이고 있다.
18세기 영국에서 도시를 계획하던 사람들은 이 키르쿠스 개념을 차용해 원형으로 설계된 건축물과 광장을 서커스 circus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광장 하면 보통 넓고 툭 터진 네모난 모양이다. 하지만 유독 영국에는 서커스라 이름 붙은 둥근 광장이 많다. 런던의 유명한 원형광장만 해도 옥스포드 서커스, 세인트 제임스 서커스, 피카딜리 서커스 등 세 군데나 된다.
내 생각엔 이것이 영국의 도로 체계와 관련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 런던의 도로체계는 피카딜리 서커스와 같은 주요 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데, 그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 역시 내 짐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피카딜리 서커스
피카딜리 하면 나이든 사람들은 서울 종로 3가에 있던 피카딜리 극장을 떠올리게 된다. 19세기에 등장한 피카딜리 광장이 종로 3가 극장이름을 따랐을 리는 없고, 어디서 나온 말일까?
피카딜리라는 이름의 유래
17세기, 영국에는 로버트 베이커라는 유명한 재단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피카딜(piccadill)이란 특별한 옷깃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피카딜은 스페인어 피카딜로(piccadillo)에서 나온 말로, 작은 가장자리나 칼라 같은 옷깃을 말한다고 한다.
큰 부자가 된 베이커는 현재 피카딜리 지역에 피카딜리 홀이라 불린 큰 저택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 전체가 피카딜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원형광장이라면서?
피카딜리 서커스가 물론 다른 광장처럼 네모 반듯한 것은 아니지만 동그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원형광장이라고 하는 걸까?
사실 1819년 처음 설계되었을 때는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활처럼 생긴 고전적인 조지언 양식의 건물들로 둘러싸인 우아한 원형 광장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동차도 네온사인도 없는, 마차들이나 오가는 조용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도시계획으로 주변 건물도 바뀌고, 현대적인 상업 공간으로 변모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런던 한복판에 왜 에로스 상이?
피카딜리 서커스 한복판에는 에로스 상이 서 있다. 10개도 넘는 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날개에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어린 에로스도 아니고 다 큰 청년 에로스다. 19세기라면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주 엄격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광장 한복판에 그리스의 신, 그것도 애욕의 신을 버젓이 세워놓았을까?
이것이야 말로 오해 중의 오해다. 사실 이것은 에로스 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에로스라고 한 것은 이 동상에게 날개와 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공식 이름은 그와 전혀 다른 '샤프츠버리 기념비 분수(Shaftesbury Memorial Fountain)'며, 활을 든 날개 달린 청년은 에로스가 아니라 기독교적 자선(Christian Charity)'을 상징하는 '형제애의 천사'였다.
1839년 설치된 이것은 조각가 알프레드 길버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7대 샤프츠버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 쿠퍼의 자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정신병자 치료를 개선하고 아편 거래 중단을 위해 노력했다. 또 어린이 노동을 금지해 아이들이 착취당하는 대신 교육을 받도록 해 많은 존경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기독교 정신과 자선, 형제 사랑은 잊혀지고, 천사는 엉뚱하게도(어쩌면 치욕스럽게도) 애욕의 상징 에로스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니 런던 어떤 교회가 펍이 되어버렸다는 뉴스가 나오게 된 거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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