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비바람에도 아름답던 슬픈 도시

요코하마, 비바람에도 아름답던 슬픈 도시

요코하마. 이번에 오기 전, 요코하마는 내게 '항구도시, 괴담과 엔카에 등장했던 곳'이었다. 화물선으로 가득한 항구, 자욱한 안개와 매연, 복작대는 거리.... 하지만 이번 방문에서 본 요코하마는 고즈넉하고 한적한 곳, 조경이 잘 되어 비바람에도 아름다운 공원 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역사가 오래다 보니, 고색창연한 유럽식 건물과 새로 지은 고층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조계지 때문인지 상하이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야마시타 공원

요코하마, 비바람에도 아름답던 슬픈 도시
요코하마 야마시타 공원. 멀리 히카와마루호가 보인다

 

요코하마에서 처음 간 곳은 야마시타 공원이었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이 공원에 산이 어디 있다고 야마시타(山下)란 말인가. 혹시 사람 이름인가? 대체 어디서 나온 이름일지 궁금했다.

 

야마시타 공원은 1923년 관동 대지진 잔해를 매립해 1930년 개장한 곳으로, 요코하마 항구를 따라 700미터가량 이어지는 일본 최초의 임해공원이다. 멀리 보이는 배는 히카와마루(氷川丸)라는 배인데, 과거 시애틀을 비롯해 태평양을 횡단하던 호화여객선이다.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견학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젠 은퇴한 호화여객선 히카와마루氷川丸

 

정문에서 시작해 공원을 반시계방향으로 돌다보면 '인도 수탑'을 만나게 된다. 옆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 인도 상인 연합회가 기증한 것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요코하마 시가 인도 등 외국 상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구제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무척 아름다운 조형물(건축물이라 해야 할까)이었으나, 한편으론 기가 막혔다. 

 

인도 상인연합회가 기증한 수탑

 

한국인이라면 관동대지진과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관동 대학살이다. 지진으로 혼란기를 겪게 되자,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군경과 자경단 합동으로 학살을 벌여 6,7천 명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당시 확산세를 보이던 사회주의에 위협을 느끼던 일본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 혼란스러운 그때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왜 거기에 재일한국인이 수단이 되고 희생이 되어야 했단 말인가. 식민지로 삼았기에 뒤탈이 없어서였나. 

 

시국 안정을 위해 한국을 희생물로 삼은 일본은 동시에 인도를 비롯한 외국 상인들에겐 조속하고 적극적인 구제조치를 취했다. 필요에 따라선 선행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고있지만, 이렇게 정도를 넘어서는 것을 보면 정말.... 나라든 개인이든 힘이 있어야 한다. 새삼 느끼게 되는 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시타 공원의 장미는 아름다웠다. 비에 젖은 장미는 가슴아픈 역사를 곱씹던 마음에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연약해 보이나 웬만한 비바람에는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꽃들에게서, 난 그 모진 수모를 겪고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의연히 선 우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비에 젖은 장미

 

아름다운 걸 보면 위안이 되는가. 흩뿌리는 비바람에도 아름다운 장미를 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 울화를 삭힐 수 있었다.  동영상에서 멀리 보이는 높은 탑은 마린 타워다. 높이 106미터에 달하는 이 탑은 요코하마 개항 100주년을 기념해 1961년 만들어진 등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등대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등대 대신 전망대 역할만 하고 있다.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야마시타 공원에서 나와 길을 건너 차이나 타운으로 향했다.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볼 수 있던 제1패루와 쌍둥이처럼 닮은 문이 나타났다.  '중화가 中華街'라고 쓰인 것까지 똑같다.

 

오른쪽에 보이는 북경반점에는 '베이징' 대신 '페킹'이라고 적혀있다. 우리가 아는 베이징은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발음이다. 페킹은 20세기 초, 중국에서 우편 행정용으로 사용한 로마자 표기법인 우정식병음(郵政式拼音)에 따른 것이다. 페킹이란 말은 400년 전, 프랑스 선교사가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는 베이징 대신 페킹을 더 많이 쓴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어째서 페킹을 쓰는 걸까?

 

요코하마, 비바람에도 아름답던 슬픈 도시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입구

 

4시 반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날이 흐려 그런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하지만 정확한 배꼽시계는 출출하다 신호를 보낸다. 하기야 이때쯤이면 딱 간식 먹을 시간이지. '여긴 또 어떤 먹을 거리가 있을까?' 하면서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몰아치는 돌풍. 정신이 아득할 정도다. 게다가 멀리 어디선가 간판이라도 떨어졌는지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차이나타운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근처에 있던 도토루로 들어갔다. 특색 있는 다른 곳은 죄다 테이크아웃 점포뿐이라 할 수 없었다.

 

아이스 루이보스티 & 아이스 커피

 

익숙한 곳에 들어와 문을 닫으니 아늑하다. 낯선 곳에서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못 잘까 싶어 난 아이스 루이보스티를 주문했다. 남편은 겁도 없이 아이스 커피. 여기서 마신 루이보스티는 일품이었다. 분명 티백으로 우렸을 텐데, 맛과 향이 달랐다. 커피는 그냥 그런 맛이었지만, 루이보스티는 이제까지 마셔본 중에 최고였다.

 

대학교 수학여행때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한계령 휴게소에서 마셨던 커피가 인생커피였는데, 이곳에서 마신 루이보스티는 아마도 인생 티로 등극할 것만 같다. 둘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거칠고 험한 날씨에 쉘터 같은 곳에서 아늑함을 느끼게 해 준 것일까. 아무래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만 같다.

 

여행하면서 몰스킨에 일기를 썼다. 그중 요코하마에 대한 부분.

이동하면서, 혹은 자기 전 잠깐씩 호텔에서 썼는데, 이렇게 남긴 기록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한 권의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쩐지 괜히 뿌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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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야마시타 공원에선 '가든 넥클리스 요코하마 2024'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6월 1일부터는 꽃과 그릇의 하모니 2024가 개최된다니, 그때쯤 요코하마를 방문하는 분들은 찾아봐도 좋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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